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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를 무슨 맛으로 먹어? 그랬던 남편이 저지른 일.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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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수수 한 끼 옥수수 수염도 맛을 내는 데 한 몫 합니다.

하나의 열매가 입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땀, 실패, 협동, 나눔이 일궈낸 옥수수의 참맛.

요 며칠, 눈 뜨면 가장 먼저 옥수수부터 찐다. 옥수수 본연의 단맛을 느끼고 싶어 소금만 조금 넣는다. 잘 익은 옥수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옥수수향이 집안 가득 퍼지면 냄비에서 올라오는 열기도 밉지 않다.

무더운 여름이 조금이라도 좋은 이유는 옥수수 때문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가 식탁 위에 있으면 밥 보기를 돌 보듯 하게 된다. 반질반질한 조약돌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이 사랑스럽다.

열기가 식기도 전에 두세 개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우는데, 보는 사람 눈에도 급해 보일 만큼 빠르다. 알갱이가 터지는 식감과 쫀득함이 기억 저편에서 살아나는 아침이다. 이쯤이면 여름 더위를 이겨낼 에너지원으로 '엄지 척'이다.

남편의 옥수수 재배는 밭두렁을 둘러싼 곳에 드문드문, 순전히 아내만을 위한 영역이었다. 점점 재배량도 늘렸지만 제대로 된 옥수수가 집에 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툭하면 벌레가, 어느 날은 고라니와 새가 맛있게 식사를 하고 갔다. 허망함만 남겨놓고 대책 없이 숨어버리는 손님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실한 해갈이만 반복하던 끝에 드디어 성공의 날이 왔다. 며칠 전 따야 할 시기를 알기 위해 몇 개 따온 옥수수는 꿀맛이었다. 지난해 옥수수 밭을 망쳐놓은 고라니도 염치가 있었던지 드물게 오고, 벌레와 새도 용서 가능한 범위에서 왔다갔다. 남편의 방어력과 경력이 노하우로 작용했을까. 제법 잘 자라 수확량이 기대됐다.

"아! 맛있다. 정말 맛있다!"

남편의 입에서 탄성이 옥수수 알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 못하겠다던 남편이 옥수수를 하모니카 불 듯 먹었다. 떼어주는 몇 알로 옥수수 먹기를 대신하며 거리두기를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아한 일이었다. '바로 이 맛이야'라는 표정은 마치 그동안 옥수수를 안 먹었던 이유가 '바로 이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농사라는 게 느긋해 보여도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일이어서 수고와 땀이 곱으로 들어가는 날이 있다. 숨만 쉬어도 땀샘이 열리는 남편은 옷을 두 번씩 갈아입었다. 수고의 자리를 기쁨으로 채워주는 것 중의 으뜸은 나눔. 그는 친척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며 한낮의 오수도 반납했다.

하나의 열매가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것을 시작으로 해충과 산짐승, 새들의 협조, 무엇보다 햇빛과 물의 조화가 함께하는 합작품이다. 시장에서 완제품을 사서 먹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농부만이 누리는 특권이 있다. 애정을 쏟은 만큼 더 맛있게 느껴지고 더 크게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 귀하게 다뤄질 수 밖에.

오늘 아침, 벌레 먹은 옥수수를 정리하다가 옛말이 생각났다. 신발장사가 고무신을 짝짝이로 신는다더니. 딱 지금 우리 모습이다. 돈 주고 샀다면 투덜거리고도 남겠지만, 남편의 땀방울이 소중해서 벌레 먹은 옥수수도 뚝 잘라 버리지 못한다. 알알이 따서 밥에다 넣어 먹을 요량으로 내 엄지손톱이 기지를 발휘한다. 쌀쌀한 계절, 옥수수향이 그리울 때를 위한 비축이다.

김순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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