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어기진 않겠다, 그러나 무조건 막는 비법정구간은 탁상공론이다.
2021.08
18
뉴스관리팀장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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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천사의 백두대간 일시 종주기 <6> 작점고개~큰재~신의터재~비재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일시종주 15일차 – 작점고개~큰재
어제 조금밖에 안 걸어서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서울 다녀온다고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아침에 일어나는게 유난히 힘들었다. 6시에 맞춰둔 알람을 놓치고 계속 정신을 못 차리다가 7시가 되어 겨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발목 상태부터 체크했다.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게, 원래는 아킬레스건쪽을 누르기만 해도 통증이 확 왔는데 이제는 그래도 통증이 덜하다. 이전의 경험들을 통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에, 며칠 더 걸어보고 호전이 없다 싶으면 며칠간 제로데이를 가져야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고 텐트를 패킹한 뒤 8시 10분, 오늘의 길을 나선다. 추풍령에서부터 큰재, 신의터재까지는 계속 완만하고 무난한 길이 이어진다고 해서 부담이 없었고, 또 발목 때문이라도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라 조급함도 없었다. 나름 여태까지도 조급해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걸었는데, 그럼에도 빨리 가고 싶다는 욕심을 못 버렸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빨리, 많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되새긴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고. 작년 3월,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를 걷기 위해 7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차를 팔고, 갖고 있던 모든 짐을 다 처분한 뒤 출국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심해졌고, 나는 샌디에고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 넘게 울면서 고민을 하다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 당시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받곤 했는데, 당시 가장 마음에 닿았던 조언이 내가 계속 되새긴 그 문구다.
“채울씨, 너무 슬퍼하지도, 조급해하지도 말아요.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작점고개에서 20분정도 오르니 무좌골산에 도착하고, 용문산에서 웅이산을 향한다. 용문산에서 웅이산 가는 길에 샘터가 있다고 해서 샘터 안내 표시가 있는 삼거리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샘터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계단과 흙길을 따라 3~4분정도 내려오니 우측에 샘터가 있었는데, 샘터 표식이나 산악회 리본 등이 전혀 없어 자세히 살펴보며 내려가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듯 했다.
샘터는 호스 없이 물이 바닥에서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물 받기가 어려워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작은 돌멩이와 나뭇잎을 활용해 1.3L 정도를 보충했다. 사실 서울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일들인데, 이제는 흐르는 물을 거부감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는 내가 새삼 신기하고 재미있다. 하루하루 거듭해갈수록 자연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샘터에서 취수 후 웅이산 정상에 도달하고, 웅이산 이후로는 2.9㎞의 하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큰재를 만날 수 있다. 큰재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아스팔트길과 민가를 마주하는데, 이 때 우측으로 길 따라 내려오면 상주시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을 만날 수 있다. 지리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며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을 2-3번은 마주친 것 같은데, 이렇게 대간길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둘러보니 교육장에는 넓은 잔디밭에 화장실도 있고, 정자도 있고, 개수대도 있다. 박지로서 너무 좋아 보여 여기서 야영을 할까 싶었지만, 야영 금지되어있는 곳이라는 걸 확인하고 아쉽지만 포기했다. 어차피 오늘도 발목을 위해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큰재에서 조금 더 올라 적당한 곳에서 텐트 치고 잘 생각에 교육장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나가시던 생태교육장 직원분들이 사무실 들러서 쉬고 가라고 하신다.
쭈뼛쭈뼛 들어서니 직원분들께서 덥지 않냐고 하시며 에어컨을 틀어 주시고, 커피와 사탕을 주시며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고, 앞으로 나아갈 길들에 대한 정보들을 알려주시며 힘을 북돋아 주셨다. 쉬엄쉬엄 가니 발목이 괜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쩔뚝거리며 걷는지, 어쩐지 걷는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고 말씀하신다. 빨리 가는 것보단 천천히 즐기는게 더 중요하다고, 늦으면 늦는만큼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 그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70세 노인의 경험이라며 숲해설가 선생님께서 조언을 해주셨다.
짧지만 감사했던 만남을 뒤로 하고 오늘의 박지를 찾아 길을 나선다. 개터재에는 적당한 박지가 없어 개터재 전이나 조금 더 지나서 야영을 하는게 좋을 것이라 알려주셔서 조금만 가보다가 괜찮은 곳을 만나면 텐트를 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큰재 들머리에서 약 1.5㎞후 도착한 곳에서 꽤 괜찮은 박지를 만나 오늘의 집을 지었다.
일찍 운행을 마쳤기에 모처럼 여유있는 오후라 누워서 하염없이 경치를 구경하기도 하고, 노래를 듣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푹 쉬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와 다르게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자료 조사도 하지 않고 그저 텐트에서 뒹굴며 하루 종일 쉬기만 했다. 숲해설가 선생님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늦으면 늦는 만큼 더 오래 즐길 수 있다니, 생각의 전환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만 살아가려고 하는게 아닐까. 조금은 더 천천히 세상을 즐기며 살아야겠다.
일시종주 16일차 - 큰재~신의터재
밤 9시쯤, 멀리서부터 작은 인기척이 들려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하고 있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괴생물체(?)가 점점 내 텐트를 향해오고 있다. 설마, 설마 멧돼지인가? 잔뜩 긴장한 채로 누워있는데 그 순간 텐트 바로 옆에서 “아아아악!”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로 옆에서 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고라니라는 걸 알고 나니 얼마나 안심되던지, 이제 고라니와는 만나면 반가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박지에서 운행을 시작하고 5분도 채 안 걸려 임도와 마주친다. 알고보니 박지 바로 근처가 회룡목장 갈림길이었다. 임도를 만난 후 목장 방면으로 임도 따라 쭉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산길이 다시 연결된다. 처음엔 길이 안 보여 두리번거렸는데 역시나 오늘도 산악회 리본들이 나를 맞이해준다. 어제와 같이 전반적으로 편안한 둘레길과 같은 길이라 가벼운 트레킹 느낌으로 걸을 수 있어 아주 좋았다. 마치 백두대간이 나에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쉬어가며 걸으라고 비단길을 계속 내어주는 듯한 기분이다.
개터재를 지나 백학산까지는 길이 쉬워 편하긴 했지만 조망이 없는 흙길과 수풀길이 이어져서 조금은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큰재~화룡재 구간이 백두대간 전 구간 중 가장 지루하고 가장 쉬운 구간이라고 한다. 어쩐지, 페이스가 너무 잘 나온다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반대편에서 오소리가 나타났다. 보통은 야생동물을 마주치면 먼저 도망치는데, 이 오소리는 분명 나를 봤는데도 당당하게 계속 나에게 뛰어온다.
동물을 마주친 적은 많지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동물은 또 처음이라 당황해서 멀뚱히 서있었는데, 오소리가 나중에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건지 거의 앞까지 와서는 뒤늦게 멈추고 이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반갑게 뛰어오던 오소리의 허둥지둥 돌아가는 뒷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백두대간 중 만난 가장 귀여운 순간이었다.
워낙 조망도 없고 똑같은 풍경의 숲길이라 오늘은 유독 생각과 회상을 많이 하며 걸었다.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하고, 백두대간이 끝나면 또 무슨 일을 벌일까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하며 말이다. 여전히 난제다. 작년에 한국을 돌아올 때 내년이면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코로나는 여전히 창궐하고 있어 내년에 다시 여행을 떠날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깊다.
그게 결정되어야 꼬리를 무는 다른 고민들이 해결될 듯 하다. 진부령에 도착할 때즈음엔 고민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개머리재도 다와간다. 개머리재에서 잠깐 쉬고 싶었는데 마땅히 쉴 곳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땡볕이라 숨이 턱 막히는 날씨였기에 결국 바로 이어서 지기재로 향한다. 지기재로 가는 길은 임도 따라 내려가다가 마을을 만나 다시 길 따라 오르다 보면 아스팔트길과 산길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온다. 하지만 갈림길 방향 표시가 애매하게 되어있어 어디로 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게 자주 보이던 산악회 시그널들도 유독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산길이 맞지 않을까 싶어 여러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는데 결국 길을 못 찾고, 안전하게 가자는 생각에 이내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보기로 한다. 계속 길을 헤매다 반가운 신의터재 이정표를 만났다. 안도하며 이정표 옆으로 나있는 길로 들어섰는데, 시작부터 길이 험하다. 분명 지기재에서 신의터재까지 길 쉽다고 했는데, 희한하다.
길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길 자체도 험하고 수풀도 많아서 시작부터 팔다리가 까지며 걸었다. 결국 조금 더 걷다가 여긴 탐방로가 아니라 사면이라는 확신이 들어 좌측으로 쭉 올라가보니 이내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 짧은 200m동안 거친 수풀을 헤치며 걸었더니 힘을 꽤 많이 소진했는데, 다행히 탐방로를 만난 이후부터는 인터넷에서 익히 봐왔던 것처럼 길이 정말 쉬워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지기재에서 신의터재까지는 4.4㎞인데, 고도차가 거의 없는 산책로 느낌의 길이라 1시간 15분만에 지나올 수 있었다. 속도가 정말 잘 나오는 곳이라 눈 감았다 뜰 떄마다 순간이동을 한다.
오늘의 박지는 신의터재 정자로 정했다. 도로 바로 옆에 있어 계속 오고가는 차들로 신경 쓰이긴 하지만 정자 바로 뒤에 음수대도 있고, 마을과 가까워 편의점을 들를 수도 있다. 음수대가 있는 정자라니! 이런 훌륭한 박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게다가 오늘 밤에도 비 예보가 있어, 비가 올 때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지다 보니 어떻게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는 듯 하다.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이라 평소에는 하루 종일 물 1L를 다 못 마시는데, 오늘은 물을 4L나 마셨다. 앞으로 더 더워질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무겁더라도 물은 항상 넉넉히 들고 다녀야겠다.
일시종주 17일차 신의터재~비재
밤새 비가 꽤 많이 왔다. 저녁 8시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아침에도 그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빗줄기가 쎈 편은 아니라 산행에 무리는 없겠다 싶었다. 일반적으로 백두대간하시는 분들이 구간을 끊을 때 ‘큰재~신의터재’, ‘신의터재~화령’, ‘화령~피앗재’, ‘피앗재~밤티’ 구간으로 다니시는데, 나는 비법정탐방로인 문장재~밤티~늘재 구간을 가지 않을 것이기에 루트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지 며칠간 고민하다 결국 결정한 루트는 ‘큰재~신의터재’, ’신의터재~비재’, ‘비재~문장대’로 나눠서 가는 것. 큰재에서 비재까지는 고도차가 낮고 전반적으로 쉬운 길로 되어있어 부담이 없지만, 비재에서부터는 고도차가 생기기 시작하고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고 해서 긴장하고 있다. 며칠간 이어진 비단길에 적응되어 있었는데, 다시 어려운 길을 만나면 평소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것 같다.
백두대간을 시작하기 전 비법정탐방로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꽤 오래 했다. 백두대간 능선을 온전히 잇기 위해선 비법정탐방로를 모두 가야하는데, 큼지막한 출입금지 표지판을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백두대간을 걷고 싶어 길을 나섰지만 법을 어기면서 걷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 도달해 결국 이번 대간길에서는 모든 비법정탐방로를 우회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법정탐방로를 지정해둔게 너무 탁상공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차라리 미국의 장거리트레일처럼 매년마다 퍼밋 신청을 받아 등산객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하면 조금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자연도 어느정도 보존하고, 우리 역시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보존하겠다고 무조건적으로 길을 막아버리는 것보단 자연과 인간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충분히 해결책이 있다. 물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에서 아예 벗어나 살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신의터재 정자에서 길을 건너 보이는 아스팔트길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다시 대간길이 이어진다. 무지개산을 거쳐 윤지미산 정상까지, 전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비단길이 펼쳐져있는 탐방로라 큰 어려움없이 쭉쭉 걸어나갈 수 있었다.
윤지미산 정상에서 화령까지는 하산하는 구간이었는데, 초반 경사가 꽤 가파른데다가 밤새 비가 온 탓에 미끄러워 조심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더 이상 다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내려왔는데, 너무 조심하며 내려온건지 100m를 내려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신의터재에서 10㎞의 운행 후 화령에 도착했다. 10㎞라곤 하지만 완만한 흙길 위주라 무난했고,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화령재로 나와 윤지미산 날머리를 등지고 좌측으로 400M정도 내려오면 수청거리 삼거리를 만나고, 수청거리삼거리에서 다시 봉황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근처에 편의점도 있어 화령재 정자에서 야영을 하는 것도 괜찮은 옵션 중 하나인 듯 하다. 봉황산 정상 전의 오름이 어찌나 힘들던지, 혼자 열심히 기합을 넣으며 올랐다. 배낭무게가 좀처럼 줄어들질 않는다. 내일부터는 어렵다는 속리산 구간이 시작되니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는 음식을 부지런히 먹어 배낭 무게를 줄이고 내 몸무게를 늘릴 생각이다. 마라톤대회를 나갈 때나 평소 운동을 할 때는 배고픔을 잘 못 느끼는 편인데, 이번엔 왜인지 유독 배시계가 제 때마다 울리고, 양도 엄청 많이 늘었다.
봉황산은 1,300여년 전 봉황새가 날아들어 30여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있고, 정상이 봉황머리르 빼어 올리고 양 날개를 펼친 봉황과 같다고 하여 봉황산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길을 걷다보면 주요 산들은 정상에 설명문이 함께 설치되어있는데, 내가 오른 산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봉황산 정상에서 200m정도 내려오면 조망터가 있어 오랜만에 탁 트인 경치를 만났다. 오전 9시까지는 계속 비가 오다가 이후엔 비가 그치고 하루 종일 흐린 하늘이었는데, 그 덕분에 너무 더웠던 어제와 다르게 선선하게 산행할 수 있었다.
봉황산 도착시간이 2시, 그리고 오늘 목적지인 비재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며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전반적으로 계속 비슷한 느낌의 길이었고 큰 감흥이 있는 길도 아니어서 정말 묵묵히 그저 주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걷기만 했다.
오늘은 계속 평탄한 길이 이어진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걸었는데, 느리게 걷는 것도, 느리게 사는 것도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항상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아왔다. 19살에 회사를 입사해 회사생활을 하며, 저녁엔 학교 수업을 가고, 학생회장을 하고, 동아리활동과 대외활동, 그리고 개인프로젝트까지 준비하며 많은 것들을 한 번에 해내려고 하며 쉼없이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느리게 가다 보니 길의 모든 것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고, 더 마음 깊숙이 담게 된다. 보너스로 토끼와 다람쥐, 개구리 등 귀여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문득, 인생도 똑같지 않을까 싶다. 조금 천천히 가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생도 조금 천천히 살아보도록 해야겠다.
김순실 기자.
어린이재활병원 기부하는 28세 여성 마라토너, 홀로 백두대간 670km 종주 도전.
일시종주 15일차 – 작점고개~큰재
어제 조금밖에 안 걸어서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서울 다녀온다고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아침에 일어나는게 유난히 힘들었다. 6시에 맞춰둔 알람을 놓치고 계속 정신을 못 차리다가 7시가 되어 겨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발목 상태부터 체크했다.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게, 원래는 아킬레스건쪽을 누르기만 해도 통증이 확 왔는데 이제는 그래도 통증이 덜하다. 이전의 경험들을 통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에, 며칠 더 걸어보고 호전이 없다 싶으면 며칠간 제로데이를 가져야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고 텐트를 패킹한 뒤 8시 10분, 오늘의 길을 나선다. 추풍령에서부터 큰재, 신의터재까지는 계속 완만하고 무난한 길이 이어진다고 해서 부담이 없었고, 또 발목 때문이라도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라 조급함도 없었다. 나름 여태까지도 조급해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걸었는데, 그럼에도 빨리 가고 싶다는 욕심을 못 버렸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빨리, 많이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되새긴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고. 작년 3월, 미국 PCT(Pacific Crest Trail)를 걷기 위해 7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차를 팔고, 갖고 있던 모든 짐을 다 처분한 뒤 출국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점 심해졌고, 나는 샌디에고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주일 넘게 울면서 고민을 하다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 당시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받곤 했는데, 당시 가장 마음에 닿았던 조언이 내가 계속 되새긴 그 문구다.
“채울씨, 너무 슬퍼하지도, 조급해하지도 말아요.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작점고개에서 20분정도 오르니 무좌골산에 도착하고, 용문산에서 웅이산을 향한다. 용문산에서 웅이산 가는 길에 샘터가 있다고 해서 샘터 안내 표시가 있는 삼거리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샘터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계단과 흙길을 따라 3~4분정도 내려오니 우측에 샘터가 있었는데, 샘터 표식이나 산악회 리본 등이 전혀 없어 자세히 살펴보며 내려가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듯 했다.
샘터는 호스 없이 물이 바닥에서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물 받기가 어려워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작은 돌멩이와 나뭇잎을 활용해 1.3L 정도를 보충했다. 사실 서울에선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일들인데, 이제는 흐르는 물을 거부감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는 내가 새삼 신기하고 재미있다. 하루하루 거듭해갈수록 자연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샘터에서 취수 후 웅이산 정상에 도달하고, 웅이산 이후로는 2.9㎞의 하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큰재를 만날 수 있다. 큰재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아스팔트길과 민가를 마주하는데, 이 때 우측으로 길 따라 내려오면 상주시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을 만날 수 있다. 지리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며 백두대간생태교육장을 2-3번은 마주친 것 같은데, 이렇게 대간길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둘러보니 교육장에는 넓은 잔디밭에 화장실도 있고, 정자도 있고, 개수대도 있다. 박지로서 너무 좋아 보여 여기서 야영을 할까 싶었지만, 야영 금지되어있는 곳이라는 걸 확인하고 아쉽지만 포기했다. 어차피 오늘도 발목을 위해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큰재에서 조금 더 올라 적당한 곳에서 텐트 치고 잘 생각에 교육장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나가시던 생태교육장 직원분들이 사무실 들러서 쉬고 가라고 하신다.
쭈뼛쭈뼛 들어서니 직원분들께서 덥지 않냐고 하시며 에어컨을 틀어 주시고, 커피와 사탕을 주시며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고, 앞으로 나아갈 길들에 대한 정보들을 알려주시며 힘을 북돋아 주셨다. 쉬엄쉬엄 가니 발목이 괜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쩔뚝거리며 걷는지, 어쩐지 걷는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고 말씀하신다. 빨리 가는 것보단 천천히 즐기는게 더 중요하다고, 늦으면 늦는만큼 더 오래 즐길 수 있으니 그게 더 행복한 것이라고, 70세 노인의 경험이라며 숲해설가 선생님께서 조언을 해주셨다.
짧지만 감사했던 만남을 뒤로 하고 오늘의 박지를 찾아 길을 나선다. 개터재에는 적당한 박지가 없어 개터재 전이나 조금 더 지나서 야영을 하는게 좋을 것이라 알려주셔서 조금만 가보다가 괜찮은 곳을 만나면 텐트를 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큰재 들머리에서 약 1.5㎞후 도착한 곳에서 꽤 괜찮은 박지를 만나 오늘의 집을 지었다.
일찍 운행을 마쳤기에 모처럼 여유있는 오후라 누워서 하염없이 경치를 구경하기도 하고, 노래를 듣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푹 쉬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와 다르게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자료 조사도 하지 않고 그저 텐트에서 뒹굴며 하루 종일 쉬기만 했다. 숲해설가 선생님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늦으면 늦는 만큼 더 오래 즐길 수 있다니, 생각의 전환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만 살아가려고 하는게 아닐까. 조금은 더 천천히 세상을 즐기며 살아야겠다.
일시종주 16일차 - 큰재~신의터재
밤 9시쯤, 멀리서부터 작은 인기척이 들려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하고 있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괴생물체(?)가 점점 내 텐트를 향해오고 있다. 설마, 설마 멧돼지인가? 잔뜩 긴장한 채로 누워있는데 그 순간 텐트 바로 옆에서 “아아아악!”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로 옆에서 나는 큰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고라니라는 걸 알고 나니 얼마나 안심되던지, 이제 고라니와는 만나면 반가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박지에서 운행을 시작하고 5분도 채 안 걸려 임도와 마주친다. 알고보니 박지 바로 근처가 회룡목장 갈림길이었다. 임도를 만난 후 목장 방면으로 임도 따라 쭉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산길이 다시 연결된다. 처음엔 길이 안 보여 두리번거렸는데 역시나 오늘도 산악회 리본들이 나를 맞이해준다. 어제와 같이 전반적으로 편안한 둘레길과 같은 길이라 가벼운 트레킹 느낌으로 걸을 수 있어 아주 좋았다. 마치 백두대간이 나에게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쉬어가며 걸으라고 비단길을 계속 내어주는 듯한 기분이다.
개터재를 지나 백학산까지는 길이 쉬워 편하긴 했지만 조망이 없는 흙길과 수풀길이 이어져서 조금은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큰재~화룡재 구간이 백두대간 전 구간 중 가장 지루하고 가장 쉬운 구간이라고 한다. 어쩐지, 페이스가 너무 잘 나온다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반대편에서 오소리가 나타났다. 보통은 야생동물을 마주치면 먼저 도망치는데, 이 오소리는 분명 나를 봤는데도 당당하게 계속 나에게 뛰어온다.
동물을 마주친 적은 많지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동물은 또 처음이라 당황해서 멀뚱히 서있었는데, 오소리가 나중에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건지 거의 앞까지 와서는 뒤늦게 멈추고 이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간다. 반갑게 뛰어오던 오소리의 허둥지둥 돌아가는 뒷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백두대간 중 만난 가장 귀여운 순간이었다.
워낙 조망도 없고 똑같은 풍경의 숲길이라 오늘은 유독 생각과 회상을 많이 하며 걸었다.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하고, 백두대간이 끝나면 또 무슨 일을 벌일까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하며 말이다. 여전히 난제다. 작년에 한국을 돌아올 때 내년이면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코로나는 여전히 창궐하고 있어 내년에 다시 여행을 떠날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깊다.
그게 결정되어야 꼬리를 무는 다른 고민들이 해결될 듯 하다. 진부령에 도착할 때즈음엔 고민들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개머리재도 다와간다. 개머리재에서 잠깐 쉬고 싶었는데 마땅히 쉴 곳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땡볕이라 숨이 턱 막히는 날씨였기에 결국 바로 이어서 지기재로 향한다. 지기재로 가는 길은 임도 따라 내려가다가 마을을 만나 다시 길 따라 오르다 보면 아스팔트길과 산길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온다. 하지만 갈림길 방향 표시가 애매하게 되어있어 어디로 갈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게 자주 보이던 산악회 시그널들도 유독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산길이 맞지 않을까 싶어 여러 번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는데 결국 길을 못 찾고, 안전하게 가자는 생각에 이내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보기로 한다. 계속 길을 헤매다 반가운 신의터재 이정표를 만났다. 안도하며 이정표 옆으로 나있는 길로 들어섰는데, 시작부터 길이 험하다. 분명 지기재에서 신의터재까지 길 쉽다고 했는데, 희한하다.
길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길 자체도 험하고 수풀도 많아서 시작부터 팔다리가 까지며 걸었다. 결국 조금 더 걷다가 여긴 탐방로가 아니라 사면이라는 확신이 들어 좌측으로 쭉 올라가보니 이내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다. 짧은 200m동안 거친 수풀을 헤치며 걸었더니 힘을 꽤 많이 소진했는데, 다행히 탐방로를 만난 이후부터는 인터넷에서 익히 봐왔던 것처럼 길이 정말 쉬워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지기재에서 신의터재까지는 4.4㎞인데, 고도차가 거의 없는 산책로 느낌의 길이라 1시간 15분만에 지나올 수 있었다. 속도가 정말 잘 나오는 곳이라 눈 감았다 뜰 떄마다 순간이동을 한다.
오늘의 박지는 신의터재 정자로 정했다. 도로 바로 옆에 있어 계속 오고가는 차들로 신경 쓰이긴 하지만 정자 바로 뒤에 음수대도 있고, 마을과 가까워 편의점을 들를 수도 있다. 음수대가 있는 정자라니! 이런 훌륭한 박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게다가 오늘 밤에도 비 예보가 있어, 비가 올 때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지다 보니 어떻게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는 듯 하다.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 더웠다. 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이라 평소에는 하루 종일 물 1L를 다 못 마시는데, 오늘은 물을 4L나 마셨다. 앞으로 더 더워질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무겁더라도 물은 항상 넉넉히 들고 다녀야겠다.
일시종주 17일차 신의터재~비재
밤새 비가 꽤 많이 왔다. 저녁 8시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아침에도 그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빗줄기가 쎈 편은 아니라 산행에 무리는 없겠다 싶었다. 일반적으로 백두대간하시는 분들이 구간을 끊을 때 ‘큰재~신의터재’, ‘신의터재~화령’, ‘화령~피앗재’, ‘피앗재~밤티’ 구간으로 다니시는데, 나는 비법정탐방로인 문장재~밤티~늘재 구간을 가지 않을 것이기에 루트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지 며칠간 고민하다 결국 결정한 루트는 ‘큰재~신의터재’, ’신의터재~비재’, ‘비재~문장대’로 나눠서 가는 것. 큰재에서 비재까지는 고도차가 낮고 전반적으로 쉬운 길로 되어있어 부담이 없지만, 비재에서부터는 고도차가 생기기 시작하고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고 해서 긴장하고 있다. 며칠간 이어진 비단길에 적응되어 있었는데, 다시 어려운 길을 만나면 평소보다 더 힘들게 느껴질 것 같다.
백두대간을 시작하기 전 비법정탐방로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꽤 오래 했다. 백두대간 능선을 온전히 잇기 위해선 비법정탐방로를 모두 가야하는데, 큼지막한 출입금지 표지판을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백두대간을 걷고 싶어 길을 나섰지만 법을 어기면서 걷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 도달해 결국 이번 대간길에서는 모든 비법정탐방로를 우회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법정탐방로를 지정해둔게 너무 탁상공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차라리 미국의 장거리트레일처럼 매년마다 퍼밋 신청을 받아 등산객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하면 조금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자연도 어느정도 보존하고, 우리 역시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보존하겠다고 무조건적으로 길을 막아버리는 것보단 자연과 인간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충분히 해결책이 있다. 물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에서 아예 벗어나 살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신의터재 정자에서 길을 건너 보이는 아스팔트길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다시 대간길이 이어진다. 무지개산을 거쳐 윤지미산 정상까지, 전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비단길이 펼쳐져있는 탐방로라 큰 어려움없이 쭉쭉 걸어나갈 수 있었다.
윤지미산 정상에서 화령까지는 하산하는 구간이었는데, 초반 경사가 꽤 가파른데다가 밤새 비가 온 탓에 미끄러워 조심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더 이상 다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그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내려왔는데, 너무 조심하며 내려온건지 100m를 내려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신의터재에서 10㎞의 운행 후 화령에 도착했다. 10㎞라곤 하지만 완만한 흙길 위주라 무난했고,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화령재로 나와 윤지미산 날머리를 등지고 좌측으로 400M정도 내려오면 수청거리 삼거리를 만나고, 수청거리삼거리에서 다시 봉황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만날 수 있다.
바로 근처에 편의점도 있어 화령재 정자에서 야영을 하는 것도 괜찮은 옵션 중 하나인 듯 하다. 봉황산 정상 전의 오름이 어찌나 힘들던지, 혼자 열심히 기합을 넣으며 올랐다. 배낭무게가 좀처럼 줄어들질 않는다. 내일부터는 어렵다는 속리산 구간이 시작되니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는 음식을 부지런히 먹어 배낭 무게를 줄이고 내 몸무게를 늘릴 생각이다. 마라톤대회를 나갈 때나 평소 운동을 할 때는 배고픔을 잘 못 느끼는 편인데, 이번엔 왜인지 유독 배시계가 제 때마다 울리고, 양도 엄청 많이 늘었다.
봉황산은 1,300여년 전 봉황새가 날아들어 30여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있고, 정상이 봉황머리르 빼어 올리고 양 날개를 펼친 봉황과 같다고 하여 봉황산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길을 걷다보면 주요 산들은 정상에 설명문이 함께 설치되어있는데, 내가 오른 산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봉황산 정상에서 200m정도 내려오면 조망터가 있어 오랜만에 탁 트인 경치를 만났다. 오전 9시까지는 계속 비가 오다가 이후엔 비가 그치고 하루 종일 흐린 하늘이었는데, 그 덕분에 너무 더웠던 어제와 다르게 선선하게 산행할 수 있었다.
봉황산 도착시간이 2시, 그리고 오늘 목적지인 비재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며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전반적으로 계속 비슷한 느낌의 길이었고 큰 감흥이 있는 길도 아니어서 정말 묵묵히 그저 주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걷기만 했다.
오늘은 계속 평탄한 길이 이어진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걸었는데, 느리게 걷는 것도, 느리게 사는 것도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항상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아왔다. 19살에 회사를 입사해 회사생활을 하며, 저녁엔 학교 수업을 가고, 학생회장을 하고, 동아리활동과 대외활동, 그리고 개인프로젝트까지 준비하며 많은 것들을 한 번에 해내려고 하며 쉼없이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느리게 가다 보니 길의 모든 것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고, 더 마음 깊숙이 담게 된다. 보너스로 토끼와 다람쥐, 개구리 등 귀여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문득, 인생도 똑같지 않을까 싶다. 조금 천천히 가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처럼, 인생도 조금 천천히 살아보도록 해야겠다.
김순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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