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 “언론 취재 자유는 좌우를 따질 문제 아니다”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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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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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돈 전 의원이 2일 오후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돈 전 국회의원(70)이 지난 6월 회고록 ‘시대를 걷다’를 출간했다. 자신이 걸어온 70년 인생을 시간순으로 기록했다. 이 전 의원은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 법과대학 교수로서 환경법과 헌법을 연구했다. 동시에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칼럼 450편을 집필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1세대 환경전문가인 그는 MB정부의 ‘4대강 사업’을 최일선에서 반대했다. 2009년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국민소송단 공동대표와 운하반대전국교수모임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리며 정권의 국책사업에 싸움을 걸었다. 회고록 표현을 빌리면 “반(反)정권 단체의 수장”이 된 것으로 정파 논리를 뛰어넘는 행보였다.
2012년 총선·대선에서는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정치쇄신위원으로 보수진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 ‘박근혜의 메신저’로서 물밑에서 MBC 공정방송 파업(2012년 1월30일~7월17일, 170일 파업)을 주도했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와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회고록 곳곳에는 그의 70년 인생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생생한 언론 현장이 담겨 있다. 지난 2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의원은 “2012년 마음 고생 정말 많이 했다”고 운을 뗐다. MB정권 언론장악에 170일 파업으로 맞섰던 MBC 언론인들 이야기였다.
- 2012년 파업이 한창이던 때 손석희 앵커(당시 성신여대 교수로 시선집중 진행)가 만남을 요청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손 사장은 당시 8월 새로 구성되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구성을 통해 김재철 MBC 사장을 자연스럽게 교체하는 방안이 있고 MBC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MBC 문제를 푸는 데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 사장과는 이런저런 관계가 있었다.”
- 그 당시 보수진영은 MBC 파업 사태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모두가 MBC 문제 해결에 부정적이진 않았다. 김세연 의원이나 김종인 박사도 MBC 파업 사태 해결에 공감했다. 다만 저쪽(보수진영) 일각에서는 ‘파업을 풀어주면 MBC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이러한 여론을 전하면, 손 사장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선 본선에 들어가면 MBC가 새누리당에 편파적 방송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 당시 ‘박근혜 메신저’로서 MBC 노조(언론노조 MBC본부)와 물밑 소통했다. 이 전 의원을 통해 박근혜 후보로부터 ‘김재철 사장 퇴출’ 의지를 확인받았다고 생각한 노조는 170일 만에 파업을 풀었다.
“당시 최승호 PD, 최일구 기자, 손석희 앵커 등을 만나며 내부 여론을 들었다. 결국 ‘김재철하고는 방송할 수 없다’는 게 구성원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로 구성한 방문진 이사회는 그해 11월 김재철 해임안을 부결했다. 박근혜 후보가 김재철 해임 약속을 위반했다는 노조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지만,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 실장이 김충일 이사의 결단을 막은 것이다. 듣기로는 하금열이 전화로 ‘당신이 (김재철 해임에 표를 던지면) 나는 사표 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심 박근혜 후보가 (김재철 사장 해임을 위해) 방문진 이사 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방문진에 입김을 넣으려면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뜻을 전해야 하는데, 내 느낌에 박근혜는 그런 것을 말하길 싫어했겠다 싶다. 그때까지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재철은 큰 역할을 하던 인사였던 거다.”
- 왜 그렇게 MBC 문제 해결에 나섰던 건가?
“언론의 공공성과 취재의 자유는 좌우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보도를 이유로 MBC PD수첩 제작진 조능희 PD 등을 기소하고, 결국 3심까지 끌고 가서 처벌하겠다는 게 온당한가. 이명박 정부는 MBC를 잘못 다뤘다. PD수첩 보도가 과장됐대도 형사 처벌하는 게 맞나? MBC가 그래도 그 당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보도 등으로 진실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2012년 파업은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정흥보 전 춘전 MBC 사장도 찾아와 후배들이 수개월 월급도 못 받고 마이너스 통장도 다 거덜 났다며 해결을 부탁했다. 박근혜로서도 이명박과 차별화할 수 있는 이슈 아니었겠나?”
- 박근혜 정권에서 MBC는 사회적 흉기로 기능하며 완전 망가졌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파업을 통해 ‘적폐 경영진’을 교체했다. 최승호·박성제라는 해직 언론인 출신이 연이어 사장에 선임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김재철, 김장겸 등도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사장은 조직 운영을 해본 인사가 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 솔직한 평가로 기대보다는 못하는 것 같다. 경영은 보도와는 다른 영역이니까.”
- 책 전반에 이명박과 달리, 박근혜에는 애증이 느껴진다.
“이명박은 최악이라고 본다. 박근혜에게는 인간적 면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2009년부터 4대강 반대 운동에 앞장서서 심적으로 불편했던 시기 박근혜를 만났고 그의 살가운 모습에 감동도 받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김기춘, 윤창중 두 사람에 대한 인사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알던 박근혜가 맞는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인사가 망가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 보좌진 이춘상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회고록에 “박 후보가 대통령 당선 후 잘못돼 간 데는 이춘상이 없어진 것도 원인”이라고 썼다.
“이춘상이 살아있다면 문고리 이재만·안봉근이 그렇게 전횡을 부리진 못했을 것이다. 이춘상은 박근혜와 외부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이춘상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나와 박근혜 인연은 더 이상 없겠구나 확 느꼈다.”
- 2013년 시사IN에 4대강 사업으로 망가진 낙동강과 남한강 현지 르포기사를 기고했다. 강이 처절하게 무너진 모습을 담았다. 회고록에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보수신문과 KBS, MBC는 4대강 사업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썼다.
“난 2007년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경부 운하’를 들고 나왔을 때 박근혜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조선·동아일보 등 보수신문에서 ‘이명박 미쳤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운하를 소개하더라. 배가 산을 넘어간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다 받아줬다. 아무래도 그 당시 여성인 박근혜는 이명박과 비교하면 언론사 경영진과 스킨십 하거나 함께 자리할 기회는 적었을 테니까.”
이 전 의원은 회고록에 2012년 총선 직후를 회고하며 “그 시절 동아일보는 항상 친이(親李) 입장에서 기사를 쓰고 칼럼을 게재해서 나는 ‘동아 사람들은 민주당이 집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나’라고 생각했었다”며 “동아일보는 4대강 사업을 열렬히 지지했고, 그와 관련해서 나를 비판하는 사설까지 썼다. (중략) 4대강 사업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모르지만, 동아 계열 매체는 박근혜 비대위원회를 처음부터 틈만 나면 비난했다. 그래서 나는 그 계열 언론과는 인터뷰를 회피했다”고 밝혔다.
-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무엇이 계기가 됐나?
“1995년 9월 환경을 담당하던 조선일보 박재영 기자(현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연락을 해왔다. 자사 환경 담당 기자들이 나를 환경 사설을 쓸 수 있는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환경신문’을 표방했다. 그 당시 조선일보는 동강댐을 막는 데 1등 공신이었다. 기사, 사설, 만물상 칼럼으로 크게 보도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설 전쟁’을 회고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물을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옛 일본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허물기로 한 데 대해 동아일보 사설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철거’를 주장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보전과 이전을 주장했다. 독도에 대한 관점도 달랐다. 동아일보는 독도에 대한 지배권 강화를 명분으로 일본 인사들의 ‘독도 망언’에 정부 차원 대응을 주문한 데 반해 조선일보는 어차피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 망언에 과잉 반응할 필요 없다는 논조였다. 동아일보가 민족 관점이라면, 조선일보는 실용이었다.”
-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던 때인 2001년 방상훈 사장과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조세포탈 등 혐의로 구속됐다.
“DJ 정권 때 일인데 결과는 DJ답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YS 정권 초에도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회계 관리에 민감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회계 처리 가운데 구내식당 식사 무료 제공이 있다. 조선일보가 직원들에게 구내식당 식사를 무료 제공한 건데, 이는 급여를 주고도 세금을 징수하지 않은 것이라 세금 포탈이라고 본 거다. 조세법상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액수를 책정했다. 동아일보의 경우 2001년 세무조사 과정에서 김병관 사장의 부인이 투신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호남신문으로서 DJ에 우호적인 동아일보가 진보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일보는 DJ정권 초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선 지지를 보내곤 했는데, 점차 긴장 관계가 조성됐다. 피부로 느껴지더라.”
- DJ정부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현 국가정보원장)이 주말 퇴근 때면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들렸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신문, 그중에서도 조선일보 영향력이 컸으니까. 주말에 나와 논설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김대중 주필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박지원은 대단한 사람이다.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상대 진영을 설득하고자 했던) 당시와 비교하면,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국정 운영을 잘못한 것이다.”
- 현안 이야기를 해보자. 4·7 재보궐 선거에서 “정부·여당이 세금 가지고 놀다가 참패했다”고 진단했다. 재산제, 종부세의 급격한 인상과 급조된 정책을 비판했다. “이 정부는 이미 끝났다”고도 했다. 감세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 정부 사람들이 세금을 감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금은 국정 기본이자 가장 민감한 영역이다. 국민 권리를 가장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처리하거나 감정적으로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 국민 설득과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세금 인상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문재인을 찍었던 중도보수 유권자가 다시 국민의힘으로 돌아간 결정적 계기였다. 기본적으로 내 철학은 민간 자유와 경제 활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시장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에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 어느 한 쪽만 선택할 수 없음에도 이 정부는 한 쪽으로만 치달았다.”
-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됐다. 회고록 후반부 국민의당 역사를 서술했는데 안철수 전 의원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상돈이 꿈꾼 정치는 무엇이었나?
“영국의 자유민주당처럼 제3당으로서 거대 양당 일방 독주를 막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너무 성공했고, 수도권에선 너무 실패했다. 또 제3당 뜻을 공유할 의원 수도 적었다. 이제 누가 제3당에 공감할 것이며, 누가 신뢰할 것인가.”
그는 회고록 끝에 “20대 국회에선 4년 동안 어느 한 정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서 중간 지대에 있던 의원들이 할 만했다. 그런데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무리하게 합당하는 등 이합집산을 하면서 결국 모두 망해 버렸고, 제3당이 없어진 결과로 지금과 같은 여당 독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썼다.
- 문재인 대통령 에피소드도 기록했다. 2013년 당시 문재인 의원, 남재희·윤여준 전 장관, 이 전 의원의 식사 자리였다. 특별한 말 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만 있는 문 대통령의 겸손함에 외려 불편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자기가 만남의 호스트고, 또 대통령 후보였잖아. 원로들을 모셨으면 본인이 대화도 이끌고 그래야지. 멀뚱하게 앉아만 있고…. 그 모습에서 지금의 불통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2014년 9월 문재인 의원은 내게 박영선 원내대표와 함께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을 도와달라고 했다. 이후 ‘이상돈 비대위원장 영입설’이 보도됐고, 논란이 커지자 선임이 철회됐다. 연초 이낙연 전 대표의 전직 대통령 사면론이나 지난해 정세균 전 총리의 추미애·윤석열 동시 경질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부에 의견을 묻고 이견이 있으면 치열하게 설득하며 결과에 책임 지는 게 민주적 리더십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리더십을 오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 행보에 비판적이다.
“정치는 일반 교양 상식과 역사 인식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이 그런 과는 아니다. (윤석열이 대선주자가 된 데 대해) 정부·여당이 크게 실책한 것이고, 국민의힘이 오죽 못했으면 이럴까 싶다. 안대희에게서 느꼈던 인상이다. 2012년 새누리당에 영입됐던 안대희 전 대검 중수부장은 참신해 보였지만 정치로는 실패했다. 언론의 받아쓰기로 이름을 알린 인사 아닌가. 그래도 대통령이라면 선출직은 거쳐야 하지 않나?”
유해운 기자.
이상돈 전 국회의원(70)이 지난 6월 회고록 ‘시대를 걷다’를 출간했다. 자신이 걸어온 70년 인생을 시간순으로 기록했다. 이 전 의원은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 법과대학 교수로서 환경법과 헌법을 연구했다. 동시에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칼럼 450편을 집필한 ‘언론인’이기도 하다.
1세대 환경전문가인 그는 MB정부의 ‘4대강 사업’을 최일선에서 반대했다. 2009년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국민소송단 공동대표와 운하반대전국교수모임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리며 정권의 국책사업에 싸움을 걸었다. 회고록 표현을 빌리면 “반(反)정권 단체의 수장”이 된 것으로 정파 논리를 뛰어넘는 행보였다.
2012년 총선·대선에서는 당시 새누리당 비대위원·정치쇄신위원으로 보수진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 ‘박근혜의 메신저’로서 물밑에서 MBC 공정방송 파업(2012년 1월30일~7월17일, 170일 파업)을 주도했던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와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회고록 곳곳에는 그의 70년 인생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생생한 언론 현장이 담겨 있다. 지난 2일 서울 당산동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의원은 “2012년 마음 고생 정말 많이 했다”고 운을 뗐다. MB정권 언론장악에 170일 파업으로 맞섰던 MBC 언론인들 이야기였다.
- 2012년 파업이 한창이던 때 손석희 앵커(당시 성신여대 교수로 시선집중 진행)가 만남을 요청했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손 사장은 당시 8월 새로 구성되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구성을 통해 김재철 MBC 사장을 자연스럽게 교체하는 방안이 있고 MBC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MBC 문제를 푸는 데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 사장과는 이런저런 관계가 있었다.”
- 그 당시 보수진영은 MBC 파업 사태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모두가 MBC 문제 해결에 부정적이진 않았다. 김세연 의원이나 김종인 박사도 MBC 파업 사태 해결에 공감했다. 다만 저쪽(보수진영) 일각에서는 ‘파업을 풀어주면 MBC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이러한 여론을 전하면, 손 사장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선 본선에 들어가면 MBC가 새누리당에 편파적 방송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 당시 ‘박근혜 메신저’로서 MBC 노조(언론노조 MBC본부)와 물밑 소통했다. 이 전 의원을 통해 박근혜 후보로부터 ‘김재철 사장 퇴출’ 의지를 확인받았다고 생각한 노조는 170일 만에 파업을 풀었다.
“당시 최승호 PD, 최일구 기자, 손석희 앵커 등을 만나며 내부 여론을 들었다. 결국 ‘김재철하고는 방송할 수 없다’는 게 구성원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로 구성한 방문진 이사회는 그해 11월 김재철 해임안을 부결했다. 박근혜 후보가 김재철 해임 약속을 위반했다는 노조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지만, 하금열 청와대 대통령 실장이 김충일 이사의 결단을 막은 것이다. 듣기로는 하금열이 전화로 ‘당신이 (김재철 해임에 표를 던지면) 나는 사표 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심 박근혜 후보가 (김재철 사장 해임을 위해) 방문진 이사 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방문진에 입김을 넣으려면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뜻을 전해야 하는데, 내 느낌에 박근혜는 그런 것을 말하길 싫어했겠다 싶다. 그때까지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재철은 큰 역할을 하던 인사였던 거다.”
- 왜 그렇게 MBC 문제 해결에 나섰던 건가?
“언론의 공공성과 취재의 자유는 좌우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2008년 광우병 보도를 이유로 MBC PD수첩 제작진 조능희 PD 등을 기소하고, 결국 3심까지 끌고 가서 처벌하겠다는 게 온당한가. 이명박 정부는 MBC를 잘못 다뤘다. PD수첩 보도가 과장됐대도 형사 처벌하는 게 맞나? MBC가 그래도 그 당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보도 등으로 진실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2012년 파업은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정흥보 전 춘전 MBC 사장도 찾아와 후배들이 수개월 월급도 못 받고 마이너스 통장도 다 거덜 났다며 해결을 부탁했다. 박근혜로서도 이명박과 차별화할 수 있는 이슈 아니었겠나?”
- 박근혜 정권에서 MBC는 사회적 흉기로 기능하며 완전 망가졌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파업을 통해 ‘적폐 경영진’을 교체했다. 최승호·박성제라는 해직 언론인 출신이 연이어 사장에 선임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김재철, 김장겸 등도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사장은 조직 운영을 해본 인사가 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 솔직한 평가로 기대보다는 못하는 것 같다. 경영은 보도와는 다른 영역이니까.”
- 책 전반에 이명박과 달리, 박근혜에는 애증이 느껴진다.
“이명박은 최악이라고 본다. 박근혜에게는 인간적 면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2009년부터 4대강 반대 운동에 앞장서서 심적으로 불편했던 시기 박근혜를 만났고 그의 살가운 모습에 감동도 받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김기춘, 윤창중 두 사람에 대한 인사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알던 박근혜가 맞는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인사가 망가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 보좌진 이춘상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회고록에 “박 후보가 대통령 당선 후 잘못돼 간 데는 이춘상이 없어진 것도 원인”이라고 썼다.
“이춘상이 살아있다면 문고리 이재만·안봉근이 그렇게 전횡을 부리진 못했을 것이다. 이춘상은 박근혜와 외부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이춘상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나와 박근혜 인연은 더 이상 없겠구나 확 느꼈다.”
- 2013년 시사IN에 4대강 사업으로 망가진 낙동강과 남한강 현지 르포기사를 기고했다. 강이 처절하게 무너진 모습을 담았다. 회고록에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보수신문과 KBS, MBC는 4대강 사업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고 썼다.
“난 2007년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경부 운하’를 들고 나왔을 때 박근혜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조선·동아일보 등 보수신문에서 ‘이명박 미쳤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운하를 소개하더라. 배가 산을 넘어간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다 받아줬다. 아무래도 그 당시 여성인 박근혜는 이명박과 비교하면 언론사 경영진과 스킨십 하거나 함께 자리할 기회는 적었을 테니까.”
이 전 의원은 회고록에 2012년 총선 직후를 회고하며 “그 시절 동아일보는 항상 친이(親李) 입장에서 기사를 쓰고 칼럼을 게재해서 나는 ‘동아 사람들은 민주당이 집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나’라고 생각했었다”며 “동아일보는 4대강 사업을 열렬히 지지했고, 그와 관련해서 나를 비판하는 사설까지 썼다. (중략) 4대강 사업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모르지만, 동아 계열 매체는 박근혜 비대위원회를 처음부터 틈만 나면 비난했다. 그래서 나는 그 계열 언론과는 인터뷰를 회피했다”고 밝혔다.
-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무엇이 계기가 됐나?
“1995년 9월 환경을 담당하던 조선일보 박재영 기자(현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연락을 해왔다. 자사 환경 담당 기자들이 나를 환경 사설을 쓸 수 있는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추천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환경신문’을 표방했다. 그 당시 조선일보는 동강댐을 막는 데 1등 공신이었다. 기사, 사설, 만물상 칼럼으로 크게 보도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설 전쟁’을 회고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물을 일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옛 일본 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허물기로 한 데 대해 동아일보 사설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철거’를 주장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보전과 이전을 주장했다. 독도에 대한 관점도 달랐다. 동아일보는 독도에 대한 지배권 강화를 명분으로 일본 인사들의 ‘독도 망언’에 정부 차원 대응을 주문한 데 반해 조선일보는 어차피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 망언에 과잉 반응할 필요 없다는 논조였다. 동아일보가 민족 관점이라면, 조선일보는 실용이었다.”
-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던 때인 2001년 방상훈 사장과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조세포탈 등 혐의로 구속됐다.
“DJ 정권 때 일인데 결과는 DJ답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YS 정권 초에도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회계 관리에 민감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회계 처리 가운데 구내식당 식사 무료 제공이 있다. 조선일보가 직원들에게 구내식당 식사를 무료 제공한 건데, 이는 급여를 주고도 세금을 징수하지 않은 것이라 세금 포탈이라고 본 거다. 조세법상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액수를 책정했다. 동아일보의 경우 2001년 세무조사 과정에서 김병관 사장의 부인이 투신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호남신문으로서 DJ에 우호적인 동아일보가 진보정권에 비판적으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일보는 DJ정권 초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선 지지를 보내곤 했는데, 점차 긴장 관계가 조성됐다. 피부로 느껴지더라.”
- DJ정부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현 국가정보원장)이 주말 퇴근 때면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 들렸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신문, 그중에서도 조선일보 영향력이 컸으니까. 주말에 나와 논설위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김대중 주필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박지원은 대단한 사람이다. 지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상대 진영을 설득하고자 했던) 당시와 비교하면,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국정 운영을 잘못한 것이다.”
- 현안 이야기를 해보자. 4·7 재보궐 선거에서 “정부·여당이 세금 가지고 놀다가 참패했다”고 진단했다. 재산제, 종부세의 급격한 인상과 급조된 정책을 비판했다. “이 정부는 이미 끝났다”고도 했다. 감세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 정부 사람들이 세금을 감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세금은 국정 기본이자 가장 민감한 영역이다. 국민 권리를 가장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처리하거나 감정적으로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 국민 설득과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세금 인상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문재인을 찍었던 중도보수 유권자가 다시 국민의힘으로 돌아간 결정적 계기였다. 기본적으로 내 철학은 민간 자유와 경제 활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시장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에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 어느 한 쪽만 선택할 수 없음에도 이 정부는 한 쪽으로만 치달았다.”
-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됐다. 회고록 후반부 국민의당 역사를 서술했는데 안철수 전 의원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이상돈이 꿈꾼 정치는 무엇이었나?
“영국의 자유민주당처럼 제3당으로서 거대 양당 일방 독주를 막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너무 성공했고, 수도권에선 너무 실패했다. 또 제3당 뜻을 공유할 의원 수도 적었다. 이제 누가 제3당에 공감할 것이며, 누가 신뢰할 것인가.”
그는 회고록 끝에 “20대 국회에선 4년 동안 어느 한 정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서 중간 지대에 있던 의원들이 할 만했다. 그런데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무리하게 합당하는 등 이합집산을 하면서 결국 모두 망해 버렸고, 제3당이 없어진 결과로 지금과 같은 여당 독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썼다.
- 문재인 대통령 에피소드도 기록했다. 2013년 당시 문재인 의원, 남재희·윤여준 전 장관, 이 전 의원의 식사 자리였다. 특별한 말 없이 바른 자세로 앉아만 있는 문 대통령의 겸손함에 외려 불편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자기가 만남의 호스트고, 또 대통령 후보였잖아. 원로들을 모셨으면 본인이 대화도 이끌고 그래야지. 멀뚱하게 앉아만 있고…. 그 모습에서 지금의 불통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2014년 9월 문재인 의원은 내게 박영선 원내대표와 함께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을 도와달라고 했다. 이후 ‘이상돈 비대위원장 영입설’이 보도됐고, 논란이 커지자 선임이 철회됐다. 연초 이낙연 전 대표의 전직 대통령 사면론이나 지난해 정세균 전 총리의 추미애·윤석열 동시 경질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내부에 의견을 묻고 이견이 있으면 치열하게 설득하며 결과에 책임 지는 게 민주적 리더십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리더십을 오인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부가 필요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 윤석열 전 검찰총장 대선 행보에 비판적이다.
“정치는 일반 교양 상식과 역사 인식이 있어야 한다. 윤석열이 그런 과는 아니다. (윤석열이 대선주자가 된 데 대해) 정부·여당이 크게 실책한 것이고, 국민의힘이 오죽 못했으면 이럴까 싶다. 안대희에게서 느꼈던 인상이다. 2012년 새누리당에 영입됐던 안대희 전 대검 중수부장은 참신해 보였지만 정치로는 실패했다. 언론의 받아쓰기로 이름을 알린 인사 아닌가. 그래도 대통령이라면 선출직은 거쳐야 하지 않나?”
유해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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