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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11살에 끌려가 ‘6년의 감금’…형제복지원은 내 삶을 파괴했다

20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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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일 경상남도의 한 지역에서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김명숙(52)씨.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여성 2명 인터뷰
하루 17시간 노동…기합·구타 시달려
정신병동 끌려가 약물 투여도
진실화해위 “여성 남성보다 4배 많이 정신요양원 수용”
퇴소 뒤 35년 지났지만 트라우마 아직도

“전두환이 죽고 이순자가 과거에 대한 사과를 했잖아요. 하지만 제삼자가 하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가 달고 있는 ‘형제복지원’이라는 꼬리표는 없어지지 않잖아요.”
1981년 엄마 품이 그리운 11살 나이에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6년을 갇혀 지낸 김명숙(52)씨는 끔찍했던 기억을 보이지 않는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가며 살아왔다. “괜히 해코지를 당할까 봐 진실 규명을 신청하기가 꺼려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가족에게도 작년에 처음으로 이 일을 알렸어요.” 김씨에겐 자신을 가뒀던 형제복지원과 방관했던 국가에 대한 불신이 깊게 남아 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10년 넘게 인권침해 실상을 알리며 진실 규명을 요구해왔지만, 김씨처럼 여성 피해생존자들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박경보 형제복지원 피해자협의회 자문위원장은 “여성 피해자들의 경우 가족에게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일을 털어놓지 못해 진실 규명 신청을 꺼리기도 한다. 당시 안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을 꺼내길 더 힘들어했다. 오랜 설득 끝에 이번에 진실화해위에 접수한 피해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24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진실 규명을 앞두고 <한겨레>는 22~23일 충남과 경남에서 여성 피해생존자 두명을 만났다. 이들은 형제복지원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그 뒤 순탄치 않았던 삶에 대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두 딸의 어머니가 된 김씨는 “정신병동(형제복지원 내 정신요양원)에 갔던 일과 단체기합, 이 두 가지는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문을 뗐다.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공장에서 일했다. ‘소대’라고 불리는 생활관에는 여자 소대장이 있었지만, 단체기합을 받을 땐 남성 중대장에게도 구타를 당했다.

김씨는 “어떤 날은 코를 심하게 맞아 피가 주룩주룩 쏟아져 나왔는데, 약도 제대로 못 바르고 참아야 했다”고 했다. 13살이 된 김씨는 조금이라도 쉬고 싶어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의무실이 아닌 정신병동으로 끌려갔다
 “꾀병을 부렸더니 선생님이 저희를 막 때린 뒤 정신병동으로 데려갔는데, 영양제라면서 약을 주더라고요. 그 약만 먹으면 잠이 쏟아졌어요. 그렇게 4일 내내 약을 먹었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 뒤로는 거기에 또 갈까 봐 무서워서 아파도 말을 못 하고 일했어요.” 1987년 김씨는 퇴소했지만, 오랜 노동과 단체기합으로 마디마디 뒤틀려 있는 손가락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날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수용자 가운데 부적응자나 반항자에게 임의적으로 정신과 약물을 투여하고, 정신요양원을 소위 ‘근신 소대’로 활용한 정황도 드러났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이 1년간 342명이 매일 2번 복용할 수 있는 정신과 약물 클로르프로마진(조현병 환자의 증세 완화제) 25만정을 구입한 내역을 확인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4배 이상 높은 비율로 정신요양원에 수용됐고 조현병 사망 비율도 남성에 비해 높았다”고 밝혔다.

1980년 11살에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ㄱ씨는 14살이 되던 해 박인근 형제복지원장 사택에서 박씨 인척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는 동갑인 박씨의 딸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ㄱ씨는 “나는 왜 학교에 보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ㄱ씨는 1987년 10대에 형제복지원을 퇴소했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거기서 나와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나이가 어리지만 술집은 무조건 써주잖아요. 배운 것도 없고. 술집에 있다 보면 결국 빚을 지게 되고, 그러면 도망가지도 못하고 (가라는) 다른 술집을 가고. 난 영화가 뭔지, 맛있는 게 뭔지도 모르고 빚 갚으려고 30대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내가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그런 데를 안 갔을 텐데… 갈 데가 없는 거예요.” ㄱ씨는 몇 분을 소리 내 울었다. 그는 부산 만월동 술집 거리에서 형제복지원에서 본 언니를 마주쳤지만 서로 모른 척한 기억도 있다고 했다.

형제복지원에 갇혔던 시간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 흉터로 두 여성에게 남아 있다. 김씨는 지금까지도 수면 장애로 매일 밤잠을 설친다. “복지원에 있을 때 불침번을 섰어요. 그럼 쪽잠을 자요.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도 잠만 자면 내가 깨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잠들기가 어려워요.”

ㄱ씨는 술집을 전전하며 술과 담배에 의존했고, 때론 자해를 했다. “화가 많이 날 땐 조절을 하기 어려워요. 어린 시절을 (형제복지원에서) 군대처럼, 똑바로 안 하면 혼나고 기합받는 생활을 해서 그런지…”
그러나 이들은 트라우마를 견디며 꿋꿋이 일상을 지키고 있다. 김씨는 형제복지원을 나와 꼬박 10년 넘게 일한 공장에서 실력을 인정 받았고, 결혼한 뒤 낳은 두 딸을 키웠다. “(성격이) 밝아서 형제복지원에 있었다는 얘길 하면 사람들이 놀라요. 일을 안하면 오히려 에너지가 줄고 일을 해야 생기가 넘쳐요.” ㄱ씨도 40대에 결혼과 출산을 거친 뒤에  ‘삶의 이유’를 찾았다. “아이는 저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형제복지원 때의 영향으로 우울증이 있지만, 이제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게 돼요. 살아가는 목적이 생긴 거잖아요.”

현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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