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마저 내 편, 네 편 가르는 무서운 정권.
2021.09
24
뉴스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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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에 차려진 길바닥 분향소에서 한 시민이 조문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먹고살려고
발버둥 친 죄뿐인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으로 몬 정부가
그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 갈라
차별하고 있다.
추석 연휴 전날 자영업자 합동 분향소에 조문을 갔다. 서울 마포에서, 여수에서, 원주·안양·평택 등에서 잇따라 숨져간 자영업자들 사연이 너무도 안타까워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지하철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 분향소는 흰 천을 깐 보도블록 위에 차려져 있었다. 비닐 봉투를 포개 쌓아 임시 제단을 만들고, 영정 대신 ‘근조(謹弔) 대한민국 소상공인·자영업자’라 쓰인 액자를 올려 놓았다. 초는 일회용 컵에 꽂고 그릇에 쌀을 담아 향꽂이를 대신했다. 경찰이 장례 물품 반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변을 폴리스 라인이 둘러싸고 경찰 버스가 차벽을 쌓았다. 처량하고도 삭막한 풍경이었다.
햇볕조차 못 가리는 길바닥 추모 공간이지만 그마저 못 차릴 뻔했다. 경찰이 방역 수칙 위반을 이유로 자영업 비상대책위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7시간의 대치 끝에 겨우 약식 분향소를 허락받았다. 그나마 한 번에 한 명씩 조문한다는 등의 조건이 달렸다. 고(故) 박원순 시장, 백기완 선생 때 서울 광장에 대형 분향소가 세워졌던 것과 딴판이었다. 여론이 나빠지자 경찰은 다음 날 봉쇄 조치를 철회했다. 애당초 방역 운운한 것이 핑계였다는 뜻이었다. 영업 제한 강제로 자영업자들을 생활고에 몰아넣은 정부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몽니를 부리고 있었다.
김포의 택배 대리점주가 노조의 집단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민노총 강성 노조의 조직적 횡포가 40세 가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입을 닫았고 민주당은 그 흔한 애도 논평 하나 내지 않았다. 일만 터지면 숟가락부터 얹던 여당 대선 주자들도 누구 하나 조문 간 사람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례적인 침묵이었다. 마치 사건 자체가 없었던 양 무시하려는 듯했다.
문 정권은 ‘조문의 정치학’에 무지한 바보가 아니다. 무지하긴커녕 핑계만 생기면 감성팔이 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지난 5월 평택항 노동자가 산재 사고를 당하자 문 대통령은 평택까지 내려가 조문했다. 제천과 밀양 화재 때도 직접 빈소를 찾아 유족들에게 무릎 꿇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고 때는 수석 비서관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김포 택배점주, 마포 맥줏집 사장, 여수 치킨집 주인, 원주 노래방 업주의 잇단 비극에는 단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동자만 소중하고 자영업자는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문 정권이 자영업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4년 내내 자영업·소상공인을 못살게 구는 정책을 쏟아냈다. 소득 주도 성장 실험으로 골목 상권을 죽이고 길거리 경기를 냉각시켰다. 최저임금을 급속히 올려 근근이 버티는 영세 상인들을 폐업 위기로 몰아넣었다.
코로나가 터진 뒤엔 백신 확보에 실패해놓고 거리 두기 장기화에 따른 고통을 고스란히 자영업자들에게 전가시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자영업에게 2주일 거리 두기를 40여 회 연장한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점포를 4곳이나 운영하던 마포의 맥줏집 사장은 코로나 봉쇄 1년 반 만에 파산해 원룸 보증금으로 마지막 직원 월급을 준 뒤 세상을 떴다. 대부분 자영업자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질적 피해 보상을 거부한 채 정치 쇼만 벌였다. 전 국민 재난 지원금에 투입된 25조원이면 자영업자 100만명에게 2500만원씩 줄 수 있는 액수다. 이 돈만 제대로 썼어도 자영업자들 비극은 상당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영업을 무시하고 적대하는 정권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 근저엔 문 정권의 계급투쟁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노동과 자본의 대결로 보는 운동권식 이분법이다. 이 정권에 노동은 선(善), 자본은 악(惡)이다. 자영업도 노동자를 부리는 소자본가이니 악의 진영에 속한다. 그 결과 노동자보다 나을 게 없는 다수의 자영업·소상공인들이 졸지에 기득권 착취 세력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알바 최저임금보다 못 번다는 편의점 업주, 보험 깨 임차료 내는 식당 주인, 대출받아 밀린 월급 주는 영세 업체 사장들을 힘들게 하는 정책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 끝에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을 갈라 차별하고 있다.
모든 죽음은 똑같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 죽음의 보편적 비극성을 문 정권은 진영 논리로 상대화시키고 등급까지 매겼다. 천안함 유족들은 정부 행사 때마다 홀대당하고, 북한에 피살당한 해수부 공무원은 ‘월북자’로 몰렸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그토록 추모하던 여당은 그보다 몇 만 배는 더 국가에 공헌했을 백선엽 장군 별세 때는 애도 논평조차 생략했다.
문 정부에서 정권 편이 아닌 사람들은 죽어서도 서럽다. 급기야 먹고살려 발버둥 친 죄밖에 없는 자영업자들까지 ‘죽음의 편 가르기’ 대열에 밀어 넣고 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무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무서운 정권이다.
김경태 기자.
먹고살려고
발버둥 친 죄뿐인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으로 몬 정부가
그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 갈라
차별하고 있다.
추석 연휴 전날 자영업자 합동 분향소에 조문을 갔다. 서울 마포에서, 여수에서, 원주·안양·평택 등에서 잇따라 숨져간 자영업자들 사연이 너무도 안타까워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지하철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 분향소는 흰 천을 깐 보도블록 위에 차려져 있었다. 비닐 봉투를 포개 쌓아 임시 제단을 만들고, 영정 대신 ‘근조(謹弔) 대한민국 소상공인·자영업자’라 쓰인 액자를 올려 놓았다. 초는 일회용 컵에 꽂고 그릇에 쌀을 담아 향꽂이를 대신했다. 경찰이 장례 물품 반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변을 폴리스 라인이 둘러싸고 경찰 버스가 차벽을 쌓았다. 처량하고도 삭막한 풍경이었다.
햇볕조차 못 가리는 길바닥 추모 공간이지만 그마저 못 차릴 뻔했다. 경찰이 방역 수칙 위반을 이유로 자영업 비상대책위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7시간의 대치 끝에 겨우 약식 분향소를 허락받았다. 그나마 한 번에 한 명씩 조문한다는 등의 조건이 달렸다. 고(故) 박원순 시장, 백기완 선생 때 서울 광장에 대형 분향소가 세워졌던 것과 딴판이었다. 여론이 나빠지자 경찰은 다음 날 봉쇄 조치를 철회했다. 애당초 방역 운운한 것이 핑계였다는 뜻이었다. 영업 제한 강제로 자영업자들을 생활고에 몰아넣은 정부가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 몽니를 부리고 있었다.
김포의 택배 대리점주가 노조의 집단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민노총 강성 노조의 조직적 횡포가 40세 가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입을 닫았고 민주당은 그 흔한 애도 논평 하나 내지 않았다. 일만 터지면 숟가락부터 얹던 여당 대선 주자들도 누구 하나 조문 간 사람이 없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례적인 침묵이었다. 마치 사건 자체가 없었던 양 무시하려는 듯했다.
문 정권은 ‘조문의 정치학’에 무지한 바보가 아니다. 무지하긴커녕 핑계만 생기면 감성팔이 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지난 5월 평택항 노동자가 산재 사고를 당하자 문 대통령은 평택까지 내려가 조문했다. 제천과 밀양 화재 때도 직접 빈소를 찾아 유족들에게 무릎 꿇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고 때는 수석 비서관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그랬던 문 대통령이 김포 택배점주, 마포 맥줏집 사장, 여수 치킨집 주인, 원주 노래방 업주의 잇단 비극에는 단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동자만 소중하고 자영업자는 국민도 아니란 말인가.
문 정권이 자영업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4년 내내 자영업·소상공인을 못살게 구는 정책을 쏟아냈다. 소득 주도 성장 실험으로 골목 상권을 죽이고 길거리 경기를 냉각시켰다. 최저임금을 급속히 올려 근근이 버티는 영세 상인들을 폐업 위기로 몰아넣었다.
코로나가 터진 뒤엔 백신 확보에 실패해놓고 거리 두기 장기화에 따른 고통을 고스란히 자영업자들에게 전가시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자영업에게 2주일 거리 두기를 40여 회 연장한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점포를 4곳이나 운영하던 마포의 맥줏집 사장은 코로나 봉쇄 1년 반 만에 파산해 원룸 보증금으로 마지막 직원 월급을 준 뒤 세상을 떴다. 대부분 자영업자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질적 피해 보상을 거부한 채 정치 쇼만 벌였다. 전 국민 재난 지원금에 투입된 25조원이면 자영업자 100만명에게 2500만원씩 줄 수 있는 액수다. 이 돈만 제대로 썼어도 자영업자들 비극은 상당수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영업을 무시하고 적대하는 정권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그 근저엔 문 정권의 계급투쟁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노동과 자본의 대결로 보는 운동권식 이분법이다. 이 정권에 노동은 선(善), 자본은 악(惡)이다. 자영업도 노동자를 부리는 소자본가이니 악의 진영에 속한다. 그 결과 노동자보다 나을 게 없는 다수의 자영업·소상공인들이 졸지에 기득권 착취 세력으로 규정되고 말았다. 알바 최저임금보다 못 번다는 편의점 업주, 보험 깨 임차료 내는 식당 주인, 대출받아 밀린 월급 주는 영세 업체 사장들을 힘들게 하는 정책들이 펼쳐졌다. 그렇게 수백만 자영업자를 벼랑 끝에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죽음까지 편을 갈라 차별하고 있다.
모든 죽음은 똑같이 비극적일 것이다. 그 죽음의 보편적 비극성을 문 정권은 진영 논리로 상대화시키고 등급까지 매겼다. 천안함 유족들은 정부 행사 때마다 홀대당하고, 북한에 피살당한 해수부 공무원은 ‘월북자’로 몰렸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그토록 추모하던 여당은 그보다 몇 만 배는 더 국가에 공헌했을 백선엽 장군 별세 때는 애도 논평조차 생략했다.
문 정부에서 정권 편이 아닌 사람들은 죽어서도 서럽다. 급기야 먹고살려 발버둥 친 죄밖에 없는 자영업자들까지 ‘죽음의 편 가르기’ 대열에 밀어 넣고 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무섭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무서운 정권이다.
김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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