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값 얼마인지, 메밀국수 어떻게 먹는지, “그거 모르면 간첩이지”
2021.08
07
뉴스관리팀장
12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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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서울 관악구 장군봉 체육공원에서 드보크(공작 장비 매설 장소)를 발굴하고 있는 최정남(왼쪽)과 경주 불국사 앞에 선 강연정(오른쪽).
부부 간첩 최정남과 강연정이 장군봉 체육공원에 은닉한 공작 장비.
남한과 북한 모두 물불 가리지 않고 치열한 첩보전에 뛰어들었고 많은 이들의 삶에 희생과 고통, 아픔과 슬픔을 안겼다. 최정남·강연정 부부 간첩단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 지면에서 세계사 속의 스파이 얘기를 몇 번 한 것 같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소련 스파이로서 일본의 고급 정보를 속속들이 캐내 소련에 전달하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해 역사의 응달에서, 물밑에서, 지하에서 활약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정보기관을 운용하지 않는 나라는 없어. 아마 천국에 가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악마의 침투를 경계하는 천사 기관원이 있을 거야.
그들이 벌이는 첩보전의 내용은 대부분 역사의 지층 아래 묻혀버리기 십상이지만 인간이 나라를 세운 이후로 그 치열한 각축이 멈춘 적은 없단다. 적국과 적국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우방국 사이에서도 첩보전은 숨 가쁘게 벌어진다. 미국이 한국 해군에 정보를 제공한 한국계 미국인을 간첩 혐의로 중형에 처했고, 우리 국정원이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무역 대표단의 호텔방에서 뭔가를 빼내려다 걸려 망신살 그득 뻗쳤던 예에서 보듯 말이야.
하물며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가장 첨예하고 살벌하게 대립해온 나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빼놓는다면 어불성설이겠지. 이 두 나라는 정부를 세우기 이전부터 서로 집요하게 증오했고,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충돌은 전면전으로 치달아 쌍방 다 돌이키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휴전협정에 합의한 뒤에도 상대방에 대한 적대를 좀처럼 풀지 않은 채 70년이라는 세월을 넘겼다.
첩보전이 불꽃을 튀기면서 각인시킨 단어가 바로 ‘간첩’일 거야. “그거 모르면 간첩이지”라는 표현을 너희 세대도 쓰더구나. 이는 “담뱃값 등 남한 실정에 어두운 자”라는 1960~70년대 간첩 식별 요령에서 나온 말이다. 남한 사람들 다 아는 걸 모르니 간첩이라는 뜻이지. 실제로 담뱃값 때문에 잡힌 간첩이 있었다.
“구멍가게에 한 신사가 나타나 100원짜리 1장을 내놓고 신탄진 1갑을 산 후 거스름돈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 노인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신사는 ‘살기 힘들지 않느냐’며 물었고 노인은 그의 말투에서 머리에 번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간첩’.(〈조선일보〉 1969년 6월27일)” 이 노인은 신사를 안심시켜 집 안에 끌어들였지. 그러자 신사는 대뜸 “500원권 100뭉치를 보여주면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사달라’고 부탁했다”고 해. 노인은 확신에 차서 경찰에 신고했고 “권총 한 자루, 수류탄 3발, 한화 35만원”을 가지고 있던 좀 모자란 간첩은 맥없이 체포되고 말았단다. 1969년 당시 최고가 담배 ‘청자’가 100원에 판매되고 있었으니 ‘신탄진’은 80원 정도 했을 거야. 그 잔돈을 챙기지 않는 간첩을 예리하게 포착했던 거지. “담뱃값 모르면 간첩!”
이런 실수가 잦았던 탓에 북한도 나름 철저히 교육하고 간첩을 보냈지만 실제 상황에선 헛발질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97년 남파된 부부 간첩 최정남과 강연정도 그랬지. 거제도에 침투한 뒤 창원으로 나가기 위해 시외버스에 올라탄 그들은 1000원을 내밀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버스 요금이 940원이니 기사가 잔돈을 내주리라 여겼던 거지. 하지만 그 버스는 기사가 잔돈을 일일이 내주는 게 아니라 손님들이 잔돈 통에서 알아서 집어가는 시스템이었고, 특수훈련 받은 부부 간첩은 버스 안에서 약간 모자란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들의 실수는 계속됐다.
서울 여의도의 어느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시킨 이 간첩 부부는 간장소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어. 그렇다고 종업원을 불러서 ‘이거 어떻게 먹는 겁니까’ 물을 수도 없던 그들은 간장소스를 면 위에 그대로 붓는 해프닝을 벌이고 말았다. 아마 국민들의 신고 정신이 극에 달해 있던 1960년대 한국이었다면 즉시 신고 대상이었을 거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그 정도 기행으로 간첩신고 113 번호를 누르는 사람은 없었어.
부부 간첩이 덜미가 잡힌 건 한 편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워. 이들은 포섭 대상이던 재야 단체의 간부를 찾아가 자신들이 간첩임을 밝히며 협조를 요청하지. 그런데 이 간부는 오히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을 의심하면서 그들을 신고하고, “자신들이 간첩이라며 우리를 찾아왔다. 안기부는 이런 공작을 하지 말라”라며 성토 기자회견까지 열게 돼. 그제야 안기부는 “우리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진짜 간첩이다!” 하며 눈에 불을 켜고 이들 부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전개와 달리 부부는 매우 비극적인 결과를 맞는다. 부인 강연정은 체포돼 수사를 받던 중 독약 앰풀을 깨물고 자살을 택했다. 남편 최정남은 남쪽에 남으면서 그들의 아들인 남혁(‘남조선 혁명’의 준말이라고 한다)은 북한에서 고아로 자라게 됐어.
“리하르트 조르게보다 더 위대한 스파이”
최정남·강연정 부부 간첩단의 이야기는 사실 빙산의 일각일 거야. 남한과 북한 모두 물불 가리지 않고 치열한 첩보전에 뛰어들었고 많은 이들의 삶에 희생과 고통, 아픔과 슬픔을 떠안겼지.
대개 첩보원들, 즉 스파이들의 삶과 죽음은 드러나지 않는 게 보통이야. 국가정보원 현관에는 별 19개가 새겨져 있다. 원래는 50개가 넘었는데 “비밀 임무나 공작 중에 희생된 사람들로 공훈을 재평가하라(이병호 전 국정원장)”는 방침에 따라 18개로 줄었다가 올해 6월 1개가 추가됐지. 문재인 대통령은 별들 앞에서 묵념한 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의 길을 찾아 걸어가는” 정보요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 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순직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그쳐. 그건 전 세계 정보요원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전설적 스파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정체가 탄로나 행적이 밝혀진 사람들이야. 서두에서 말한 리하르트 조르게나 시리아 정부 깊숙이 침투했던 이스라엘 첩보원 엘리 코헨처럼 말이다. 그는 시리아 국방차관 물망에 올랐을 정도로 유능한 스파이였고, 그가 시리아 당국에 체포된 이후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온갖 제안을 하며 엘리 코헨을 살려보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지. 그가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뒤 시신의 행방은 알려진 바 없어. 사후 50년이 지나도록 이스라엘은 그 유해라도 찾겠다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2015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가 “그의 희생 덕택에 우리가 발을 뻗고 살 수 있으니 반드시 그를 모국으로 데려와 안장하겠다”라고 벼를 만큼 말이다.
남한에서 발생한 북한 첩보요원들의 범죄를 거의 부인했던 북한이 “리하르트 조르게보다 더 위대한 스파이”라며 추어올리고 영화까지 만들며 선전할 뿐 아니라 ‘공화국 영웅 1호’로 혁명열사릉에 시신 없는 묘를 조성해 모시는 사람이 있어. 그 이름은 성시백(1905~1950). 그는 해방 공간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까지 남한에서 암약하다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체포됐고 서울 함락 하루 전인 1950년 6월27일 총살당하면서 최후를 맞았다. 성시백은 어떤 간첩이었으며 남한에서 무슨 활동을 했기에 북한이 그리도 떠받드는 것일까.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첩보전 와중에 한국의 법을 어겨 범죄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고자 한다.
채강석 기자.
부부 간첩 최정남과 강연정이 장군봉 체육공원에 은닉한 공작 장비.
남한과 북한 모두 물불 가리지 않고 치열한 첩보전에 뛰어들었고 많은 이들의 삶에 희생과 고통, 아픔과 슬픔을 안겼다. 최정남·강연정 부부 간첩단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 지면에서 세계사 속의 스파이 얘기를 몇 번 한 것 같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소련 스파이로서 일본의 고급 정보를 속속들이 캐내 소련에 전달하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해 역사의 응달에서, 물밑에서, 지하에서 활약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정보기관을 운용하지 않는 나라는 없어. 아마 천국에 가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악마의 침투를 경계하는 천사 기관원이 있을 거야.
그들이 벌이는 첩보전의 내용은 대부분 역사의 지층 아래 묻혀버리기 십상이지만 인간이 나라를 세운 이후로 그 치열한 각축이 멈춘 적은 없단다. 적국과 적국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우방국 사이에서도 첩보전은 숨 가쁘게 벌어진다. 미국이 한국 해군에 정보를 제공한 한국계 미국인을 간첩 혐의로 중형에 처했고, 우리 국정원이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무역 대표단의 호텔방에서 뭔가를 빼내려다 걸려 망신살 그득 뻗쳤던 예에서 보듯 말이야.
하물며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가장 첨예하고 살벌하게 대립해온 나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빼놓는다면 어불성설이겠지. 이 두 나라는 정부를 세우기 이전부터 서로 집요하게 증오했고,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충돌은 전면전으로 치달아 쌍방 다 돌이키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휴전협정에 합의한 뒤에도 상대방에 대한 적대를 좀처럼 풀지 않은 채 70년이라는 세월을 넘겼다.
첩보전이 불꽃을 튀기면서 각인시킨 단어가 바로 ‘간첩’일 거야. “그거 모르면 간첩이지”라는 표현을 너희 세대도 쓰더구나. 이는 “담뱃값 등 남한 실정에 어두운 자”라는 1960~70년대 간첩 식별 요령에서 나온 말이다. 남한 사람들 다 아는 걸 모르니 간첩이라는 뜻이지. 실제로 담뱃값 때문에 잡힌 간첩이 있었다.
“구멍가게에 한 신사가 나타나 100원짜리 1장을 내놓고 신탄진 1갑을 산 후 거스름돈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 노인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신사는 ‘살기 힘들지 않느냐’며 물었고 노인은 그의 말투에서 머리에 번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간첩’.(〈조선일보〉 1969년 6월27일)” 이 노인은 신사를 안심시켜 집 안에 끌어들였지. 그러자 신사는 대뜸 “500원권 100뭉치를 보여주면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사달라’고 부탁했다”고 해. 노인은 확신에 차서 경찰에 신고했고 “권총 한 자루, 수류탄 3발, 한화 35만원”을 가지고 있던 좀 모자란 간첩은 맥없이 체포되고 말았단다. 1969년 당시 최고가 담배 ‘청자’가 100원에 판매되고 있었으니 ‘신탄진’은 80원 정도 했을 거야. 그 잔돈을 챙기지 않는 간첩을 예리하게 포착했던 거지. “담뱃값 모르면 간첩!”
이런 실수가 잦았던 탓에 북한도 나름 철저히 교육하고 간첩을 보냈지만 실제 상황에선 헛발질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97년 남파된 부부 간첩 최정남과 강연정도 그랬지. 거제도에 침투한 뒤 창원으로 나가기 위해 시외버스에 올라탄 그들은 1000원을 내밀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버스 요금이 940원이니 기사가 잔돈을 내주리라 여겼던 거지. 하지만 그 버스는 기사가 잔돈을 일일이 내주는 게 아니라 손님들이 잔돈 통에서 알아서 집어가는 시스템이었고, 특수훈련 받은 부부 간첩은 버스 안에서 약간 모자란 사람이 되고 말았어. 그들의 실수는 계속됐다.
서울 여의도의 어느 식당에서 메밀국수를 시킨 이 간첩 부부는 간장소스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어. 그렇다고 종업원을 불러서 ‘이거 어떻게 먹는 겁니까’ 물을 수도 없던 그들은 간장소스를 면 위에 그대로 붓는 해프닝을 벌이고 말았다. 아마 국민들의 신고 정신이 극에 달해 있던 1960년대 한국이었다면 즉시 신고 대상이었을 거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서인지 그 정도 기행으로 간첩신고 113 번호를 누르는 사람은 없었어.
부부 간첩이 덜미가 잡힌 건 한 편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워. 이들은 포섭 대상이던 재야 단체의 간부를 찾아가 자신들이 간첩임을 밝히며 협조를 요청하지. 그런데 이 간부는 오히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을 의심하면서 그들을 신고하고, “자신들이 간첩이라며 우리를 찾아왔다. 안기부는 이런 공작을 하지 말라”라며 성토 기자회견까지 열게 돼. 그제야 안기부는 “우리는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진짜 간첩이다!” 하며 눈에 불을 켜고 이들 부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전개와 달리 부부는 매우 비극적인 결과를 맞는다. 부인 강연정은 체포돼 수사를 받던 중 독약 앰풀을 깨물고 자살을 택했다. 남편 최정남은 남쪽에 남으면서 그들의 아들인 남혁(‘남조선 혁명’의 준말이라고 한다)은 북한에서 고아로 자라게 됐어.
“리하르트 조르게보다 더 위대한 스파이”
최정남·강연정 부부 간첩단의 이야기는 사실 빙산의 일각일 거야. 남한과 북한 모두 물불 가리지 않고 치열한 첩보전에 뛰어들었고 많은 이들의 삶에 희생과 고통, 아픔과 슬픔을 떠안겼지.
대개 첩보원들, 즉 스파이들의 삶과 죽음은 드러나지 않는 게 보통이야. 국가정보원 현관에는 별 19개가 새겨져 있다. 원래는 50개가 넘었는데 “비밀 임무나 공작 중에 희생된 사람들로 공훈을 재평가하라(이병호 전 국정원장)”는 방침에 따라 18개로 줄었다가 올해 6월 1개가 추가됐지. 문재인 대통령은 별들 앞에서 묵념한 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의 길을 찾아 걸어가는” 정보요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 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순직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그쳐. 그건 전 세계 정보요원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전설적 스파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정체가 탄로나 행적이 밝혀진 사람들이야. 서두에서 말한 리하르트 조르게나 시리아 정부 깊숙이 침투했던 이스라엘 첩보원 엘리 코헨처럼 말이다. 그는 시리아 국방차관 물망에 올랐을 정도로 유능한 스파이였고, 그가 시리아 당국에 체포된 이후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온갖 제안을 하며 엘리 코헨을 살려보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지. 그가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뒤 시신의 행방은 알려진 바 없어. 사후 50년이 지나도록 이스라엘은 그 유해라도 찾겠다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2015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가 “그의 희생 덕택에 우리가 발을 뻗고 살 수 있으니 반드시 그를 모국으로 데려와 안장하겠다”라고 벼를 만큼 말이다.
남한에서 발생한 북한 첩보요원들의 범죄를 거의 부인했던 북한이 “리하르트 조르게보다 더 위대한 스파이”라며 추어올리고 영화까지 만들며 선전할 뿐 아니라 ‘공화국 영웅 1호’로 혁명열사릉에 시신 없는 묘를 조성해 모시는 사람이 있어. 그 이름은 성시백(1905~1950). 그는 해방 공간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까지 남한에서 암약하다가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 체포됐고 서울 함락 하루 전인 1950년 6월27일 총살당하면서 최후를 맞았다. 성시백은 어떤 간첩이었으며 남한에서 무슨 활동을 했기에 북한이 그리도 떠받드는 것일까.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 첩보전 와중에 한국의 법을 어겨 범죄자가 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고자 한다.
채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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