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만의 귀국길…오늘 저녁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식 생중계.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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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팀장
2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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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소.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를 이끈 '독립군 영웅' 홍범도 장군이 머나먼 길을 돌아 마침내 광복절인 오늘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홍범도 장군이 서울에서 5,000km 떨어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1943년 서거한 지 78년 만입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습니다.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배우 조진웅 씨도 특사단 자격으로 동행했습니다.
배우 조진웅 씨가 특사단에 포함된 게 눈에 띄는데요. 조진웅 씨는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 역할을,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속사포' 역을 맡아서 독립 투사들을 여러 차례 연기한 바가 있습니다. 또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어서 우원식 이사장이 1순위로 추천했다고 합니다.
조진웅 씨는 카자흐스탄으로 떠나기 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면목이 없고, 많이 늦었다고 생각이 든다"며 "그래도 이렇게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실 수 있게 돼서 아주 기쁘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잘 모셔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특사단 파견에 투입된 특별수송기는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인 KC-330(시그너스)입니다. 전투기 급유는 물론 국외 재해·재난 때 국민 수송, 해외 파병부대 화물·병력 수송, 국제 평화유지 활동 지원 등의 임무 수행을 위해 2019년 1호기가 도입됐고, 최대 300여 명의 인원과 47톤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습니다.
작년 6월에도 북한에서 발굴돼 미국 하와이로 옮겨졌던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 임무를 수행한 바 있고, 최근에는 코로나19 집단감염된 청해부대원 귀국 임무에 투입됐습니다.
특사단을 태운 특별기는 14일 오전 11시 40분쯤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이륙해 현지시간 오후 3시(한국시간 오후 7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태극기로 감싼 홍범도 장군 유해, 오늘 저녁 한국 도착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대통령 특별사절단은 어제(14일) 오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열고 유해를 수습해 현지병원에 임시 안치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유해를 2m가량 지하에 매장하며, 지면에서 40cm가량의 콘크리트를 덮는다고 합니다. 이에 유해 봉환 실무지원단은 홍범도 장군 묘역의 반신 흉상 아래에 있는 기단부 석재 해체 작업 등을 진행한 뒤 지하에 묻혀있던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수습된 유해는 작은 관에 담아 카자흐스탄 국기로 관포됐으며, 고려인협회 주관으로 제례 의식이 진행됐습니다. 제수 음식으로는 삶은 닭, 밥, 물, 수저, 포크, 보드카, 생선, 돼지갈비, 떡, 과일, 삶은 계란, 오이, 토마토, 숭늉이 올려졌다고 국가보훈처는 설명했습니다.
묘역을 나선 유해는 홍범도 거리, 문화회관(구 고려극장), 계봉우 지사 거주지 등 16km가량을 경유한 뒤 크즐오르다 주 병원에 임시 안치됐습니다.
유해는 장례지도사에 의해 항공 봉송을 위한 포르말린 처리 후 큰 관으로 옮겨져 태극기로 둘려졌습니다.
특사단은 현지시각으로 오늘 오전 8시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출발합니다. 한국 의장대가 카자흐스탄 의장대로부터 홍범도 장군 유해를 인수해 공군 특별수송기로 이송합니다.
유해와 특사단 일행을 태운 특별기는 크즐오르다 시내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한 후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특별기는 오늘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한국에 도착하며, KBS는 유해봉환식을 생중계로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유해봉환식 직후 홍 장군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임시 안장되는데 16일과 17일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뒤 18일 공식 안장됩니다.
■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일본군이 벌벌 떨었다
KBS는 지난해 10월 홍범도 장군의 생전 영상을 발굴해 보도했는데요.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과 독립투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조선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 장면입니다.
당시 54살의 홍 장군은 '구 척 장신의 장군'이란 별명에 걸맞은 2미터 가까운 큰 키와 검게 그을린 얼굴, 특유의 짙은 콧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서 홍범도 장군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였던 레닌과 면담을 하는 등 명성에 걸맞은 예우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함경도에서 포수로 이름을 날리다 1907년 함경도에서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홍 장군은 1919년 9월 간도로 이동해 대한독립군을 지휘하면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봉오동 골짜기에서 수적 열세에도 매복 작전을 통해 일본군 사상자 350여 명이란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는 항일 무장 투쟁의 중대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1920년에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청산리 전투'도 승리했습니다.
■ 고국 독립 못 보고 카자흐스탄에서 잠들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 작전이 펼쳐지자 홍범도 장군은 1921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다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겪었고,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홍 장군은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움막집에서 살면서,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어가며 힘든 말년을 보내다 75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홍 장군 가족들도 항일 투쟁 중 숨져
홍범도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실명 기록 부재)는 1908년 3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남편의 의병 활동을 이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취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의 모진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큰아들 홍양순 선생 역시 1907년 북청에서 아버지와 함께 의병부대에 들어가 이듬해 함남 정평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차남 홍용환 선생도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21년 21살의 나이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족을 잃은 홍 장군은 말년까지 가족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앞서 우리 정부는 1962년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데 이어, 올해 2월엔 홍범도 장군의 부인과 장남에게 3·1절을 맞아 건국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족은 외손녀인 김 알라 씨가 있는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홍 장군의 권총집 등 유품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 카자흐스탄 대통령 국빈 방문 계기로 유해 봉환 성사
독립군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그동안 정부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정부는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봉환이 시도됐지만, 북한이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유해 봉환을 두고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면서 유해 봉환은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또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중요한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어, 고려인 사회를 설득하는 작업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했을 때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양국 정부가 실무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고려인 사회와의 논의도 지속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를 통해 유해 봉환이 결정되었음을 밝히며,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인 지난해에 유해를 봉환하려고 했으나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봉환이 연기됐습니다.
이번 홍 장군 유해 봉환은 16~17일 카심 조마르트 토가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국빈 방한에 맞춰 성사됐습니다.
위성동 기자.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를 이끈 '독립군 영웅' 홍범도 장군이 머나먼 길을 돌아 마침내 광복절인 오늘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홍범도 장군이 서울에서 5,000km 떨어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1943년 서거한 지 78년 만입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습니다.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배우 조진웅 씨도 특사단 자격으로 동행했습니다.
배우 조진웅 씨가 특사단에 포함된 게 눈에 띄는데요. 조진웅 씨는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선생 역할을,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속사포' 역을 맡아서 독립 투사들을 여러 차례 연기한 바가 있습니다. 또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어서 우원식 이사장이 1순위로 추천했다고 합니다.
조진웅 씨는 카자흐스탄으로 떠나기 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면목이 없고, 많이 늦었다고 생각이 든다"며 "그래도 이렇게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실 수 있게 돼서 아주 기쁘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잘 모셔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특사단 파견에 투입된 특별수송기는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인 KC-330(시그너스)입니다. 전투기 급유는 물론 국외 재해·재난 때 국민 수송, 해외 파병부대 화물·병력 수송, 국제 평화유지 활동 지원 등의 임무 수행을 위해 2019년 1호기가 도입됐고, 최대 300여 명의 인원과 47톤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습니다.
작년 6월에도 북한에서 발굴돼 미국 하와이로 옮겨졌던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 임무를 수행한 바 있고, 최근에는 코로나19 집단감염된 청해부대원 귀국 임무에 투입됐습니다.
특사단을 태운 특별기는 14일 오전 11시 40분쯤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이륙해 현지시간 오후 3시(한국시간 오후 7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태극기로 감싼 홍범도 장군 유해, 오늘 저녁 한국 도착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대통령 특별사절단은 어제(14일) 오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앞에서 추모식을 열고 유해를 수습해 현지병원에 임시 안치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유해를 2m가량 지하에 매장하며, 지면에서 40cm가량의 콘크리트를 덮는다고 합니다. 이에 유해 봉환 실무지원단은 홍범도 장군 묘역의 반신 흉상 아래에 있는 기단부 석재 해체 작업 등을 진행한 뒤 지하에 묻혀있던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수습된 유해는 작은 관에 담아 카자흐스탄 국기로 관포됐으며, 고려인협회 주관으로 제례 의식이 진행됐습니다. 제수 음식으로는 삶은 닭, 밥, 물, 수저, 포크, 보드카, 생선, 돼지갈비, 떡, 과일, 삶은 계란, 오이, 토마토, 숭늉이 올려졌다고 국가보훈처는 설명했습니다.
묘역을 나선 유해는 홍범도 거리, 문화회관(구 고려극장), 계봉우 지사 거주지 등 16km가량을 경유한 뒤 크즐오르다 주 병원에 임시 안치됐습니다.
유해는 장례지도사에 의해 항공 봉송을 위한 포르말린 처리 후 큰 관으로 옮겨져 태극기로 둘려졌습니다.
특사단은 현지시각으로 오늘 오전 8시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출발합니다. 한국 의장대가 카자흐스탄 의장대로부터 홍범도 장군 유해를 인수해 공군 특별수송기로 이송합니다.
유해와 특사단 일행을 태운 특별기는 크즐오르다 시내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한 후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특별기는 오늘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한국에 도착하며, KBS는 유해봉환식을 생중계로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유해봉환식 직후 홍 장군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임시 안장되는데 16일과 17일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뒤 18일 공식 안장됩니다.
■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일본군이 벌벌 떨었다
KBS는 지난해 10월 홍범도 장군의 생전 영상을 발굴해 보도했는데요.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과 독립투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조선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 장면입니다.
당시 54살의 홍 장군은 '구 척 장신의 장군'이란 별명에 걸맞은 2미터 가까운 큰 키와 검게 그을린 얼굴, 특유의 짙은 콧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서 홍범도 장군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였던 레닌과 면담을 하는 등 명성에 걸맞은 예우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함경도에서 포수로 이름을 날리다 1907년 함경도에서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홍 장군은 1919년 9월 간도로 이동해 대한독립군을 지휘하면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봉오동 골짜기에서 수적 열세에도 매복 작전을 통해 일본군 사상자 350여 명이란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는 항일 무장 투쟁의 중대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1920년에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청산리 전투'도 승리했습니다.
■ 고국 독립 못 보고 카자흐스탄에서 잠들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 작전이 펼쳐지자 홍범도 장군은 1921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다 한인 무장세력 간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겪었고,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홍 장군은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홍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움막집에서 살면서,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어가며 힘든 말년을 보내다 75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홍 장군 가족들도 항일 투쟁 중 숨져
홍범도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실명 기록 부재)는 1908년 3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남편의 의병 활동을 이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취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의 모진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큰아들 홍양순 선생 역시 1907년 북청에서 아버지와 함께 의병부대에 들어가 이듬해 함남 정평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차남 홍용환 선생도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21년 21살의 나이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가족을 잃은 홍 장군은 말년까지 가족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앞서 우리 정부는 1962년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데 이어, 올해 2월엔 홍범도 장군의 부인과 장남에게 3·1절을 맞아 건국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족은 외손녀인 김 알라 씨가 있는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홍 장군의 권총집 등 유품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 카자흐스탄 대통령 국빈 방문 계기로 유해 봉환 성사
독립군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그동안 정부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정부는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봉환이 시도됐지만, 북한이 카자흐스탄 정부에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란 점을 들어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유해 봉환을 두고 남북이 신경전을 벌이면서 유해 봉환은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또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중요한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어, 고려인 사회를 설득하는 작업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했을 때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양국 정부가 실무 협의에 들어갔습니다. 고려인 사회와의 논의도 지속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를 통해 유해 봉환이 결정되었음을 밝히며,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인 지난해에 유해를 봉환하려고 했으나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봉환이 연기됐습니다.
이번 홍 장군 유해 봉환은 16~17일 카심 조마르트 토가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국빈 방한에 맞춰 성사됐습니다.
위성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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